아스타리온 안쿠닌이 라이스윈, 아니 레센에 다시 발을 들인 것은 거의 200년만의 일이었다. 마법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3000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7900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염살이 더 이상 강렬하지 않았다. 겨우 촛불 하나를 밝힐 만한 세기의 불꽃이 그의 손에서 피어났고, 이내 곧 사그라들었다.
언더다크의 페이즈리스 역시 천천히 사라졌고, 결국 텅 빈 동굴만 남았다. 언제 그가 언더다크에서 나왔는지 아스타리온은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언젠가, 였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세계는 인간으로 가득했지만, 다행히 요새는 여러가지 성형이 유행했다. 그는 자신을 알비노라고 소개하고, 사람들이 그의 뾰족한 귀를 볼 때마다 그냥, 어린 시절에 어떤 영화-그는 아직도 이미지가 마법의 힘 없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100년도 넘게 인간과 함께한 발명품이었음에도-를 보고 감명받아 성형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음과 함께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곤 했다. 아니, 인간들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이제는 인간밖에 없으니 사람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바뀌어버린 세상에서도 항상 같은 것들은 있었다. 인간들은 아직도 잘 쓴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걸 여러가지 형태로 재해석해 올렸다. 땅에서 나는 작물은 인간의 배를 배불렸고, 아스타리온은 덕분에 농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와 마법과 저주가 없는 세상에서 농장이란 피를 주기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다.
라이스윈, 아니, 레센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발더스 게이트 인근의 항구 도시, 번화하기 딱 좋은 위치 아닌가? 밤이어도 낮처럼 밝은 와중 가로등에 번쩍이는, 유리로 덮은 건물을 보면서 아스타리온은 할신은 이걸 싫어했을거야, 라고 픽 웃으며 극장 안으로 걸어갔다. 영화가 존재하는데 아직도 오페라를 본다니, 누군가는 이걸 고급스러운 취미라고 할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그저 이전 시대의 취향에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옆자리의 사람들이 <마법사와 기사>에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 저 멀리서 온 누가 지휘를 하는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이럴 때마다 자신은 거의 만년 전 이 극의 모티프가 된 사건 당시 기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곤 했다. 자신은 슬퍼하는 마법사가 시를 짓던 것도, 어떤 바드가 거기에 가락을 붙인 것도, 사람들이 인형극과 길거리 노래로 불러대던 것도, 이제는 고가에 거래되다 못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책에 실려있던 것도 봤노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옆사람들은 오페라를 매우 좋아하거나, 아니면 관련해서 학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은유와 상징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유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었지만, 이제 그걸 기억할 사람들은 없었다. 아스타리온을 제외하면 모두가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커튼이 올라가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극이 시작됐다.
회색 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이 변형되고 이야기가 변주되는 것은 쉬이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래도, 자신의 첫 친구였던 두르벤텔이 여자로 해석된 건 늘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일은 수염이 있었기에 그럴 일이 없었어서인가? 옆사람들은 옛날에는 여성들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기에 수염이 없는 남자가 이 역할을 맡곤 했다는 말을 속삭였다.
아니, 걘 남자였어. 아스타리온은 생각했다. 피부가 회색인 남자였고, 니네 은유와 상징이 대체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로우나 하프 드로우를 본 적이 없으니 점점 더 피부가 회색이었다는 표현을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회색 분장을 했다, 혹은 회색 옷을 입었다로 해석했겠지.
무대에서 기사는 정의와 맹세의 중요성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게 더 두르벤텔다웠다. 아스타리온은 90년 전, <마법사와 기사>에서 기사가 나라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 노래하는 장면에서 크게 웃어버리고 말아 주변인들의 눈치를 따갑게 받은 적이 있다. 두르벤텔은 어떤 나라에도 충성하지 않았는데, 후대인들은 멋대로 변형하는구나, 진짜 두르벤텔이 곁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 얼굴을 찌푸리며 나는 저런 적이 없었다고 하겠지, 본인들의 정치적 신념을 자신의 입에 쑤셔넣지 말라고 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만 웃어버렸다. 그 이후에도 한참이나, 애국심과 민족과 충성에 대한 내용이 나올때마다 아스타리온은 킥킥댔다. 그리고 결국 1막이 끝난 후에 끌려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마법사라는 직업이 없었으므로 그때는 게일을 과학자로 해석했는데, 이 극은 “전통적 극에 충실하기”위해 노력했으므로 게일은 과학자가 아닌 마법사로 나왔다. 흰 과학실 코트를 입고 플라스크에 연기나는 액체를 넣는 게일도 웃겼는데, 아스타리온은 생각하며 배우가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고-요새 ‘판타지’ 문학이 흥행하면서 팔 길이만한 마법 지팡이가 마법사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게일이라면 분명 아, 저건 마법사에 대한 모욕이야, 주문 영창은 목소리와 움직임, 그리고 마음만으로도 마법을 부릴 수 있어, 라고 했을 것이다-모자에서 리본이 터져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 역시 웃긴 일이었다. 군중 속에서 그와 함께 웃어줄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에 아스타리온은 익숙했다.
극은 그들의 일상을 보여줬다. 임무에 나가는 기사, 기다리는 마법사, 입양한 세 명의 아이. 어떤 극에서는 아이가 너무 많고 역할이 겹친다며 한 명으로 줄이기도 했다. 1막의 클라이막스는 거대한 네더브레인의 등장이었는데, 시간순서가 뒤죽박죽된 건 아스타리온은 이제 익숙했다. 네더브레인 역시 정말 떠다니는 뇌가 아닌, 사악한 마법사로 설정됐다. 기사는 혼자 ‘네더브레인’을 격퇴하고, 으레 이 극에서 그렇듯 칼을 검집에 꽂은 후 ‘게일’이 있는 탑을 바라봤다. 그 때, 네더브레인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기사에게 불을 뿜었다.
기사는 아주 길고, 비극적인 아리아를 부른 후 쓰러졌다. 네더브레인이 죽인 사람들은 회색 베일을 덮은 유령으로 묘사되었는데, 기사가 ‘게일’에 의해 ‘화장’되자마자 그들은 기사에게 같은 회색 베일을 덮고 자신들이 서 있는 배경 쪽으로 데려갔다. 보라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구슬프게 노래하곤, 이내 커튼이 내려갔다.
그나마 이게 현실에 비슷한 축이라니 믿을 수 없군, 이라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인터미션 중간에 공연 팜플렛을 읽어내려갔다. 하긴, 가루로 변했다는 것을 읽으면 이제 사람들은 분해마법이 아니라 화장당했다를 더 쉽게 연상하곤 하는 세상이었다. 텀블러에서 오늘 갓 짠 염소피를 마시며 그는 옆사람들의 속닥임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어째서 사악한 마법사의 이름이 ‘네더브레인’인지에 대한 토론과, 그래서 ‘네더브레인’의 로브에 뇌 모양 문양이 들어간다는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바보들.
하지만 귀여운 바보들이었다.
2막에서는 기사가 주로 회색 베일을 쓴 채 극 내내 ‘게일’을 바라보기만 한다. 가끔 ‘게일’이 사악한 술수를 부리려 할때마다 그에게 1막에서 나온 정의와 맹세의 아리아를 반복하고, ‘게일’의 아이들이 ‘게일’을 막는다. 막내 애가 점점 자라서 자신도 ‘기사’가 되겠다고 말하고, ‘게일’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가 떠나는 것을 본다. 이것까지는 뭐, 평이했다.
하지만 아스타리온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게 한 부분은 2막 끝에서 등장했다.